▲여한구(오른쪽 두 번째)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3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미국 상무부 돈 그레이브스 부장관과 한·미 대 러시아 수출통제 등과 관련해 면담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여한구(오른쪽 두 번째) 통상교섭본부장이 3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미국 상무부 돈 그레이브스 부장관과 한·미 대 러시아 수출통제 등과 관련해 면담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침공 중인 러시아 수출통제 조치인 해외직접제품규제(FDPR)적용 면제국에 우리나라를 포함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기업들이 FDPR 관련 제품을 러시아로 수출할 때 미국의 승인을 받지 않아도 된다. 

앞서 미국 정부가 스마트폰·완성차·세탁기 등 일반 소비재는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 제재 예외 대상이라고 밝힌 데 이어 나온 뚜렷한 가이드라인으로, 우리 기업들의 불확실성은 줄어들 전망이다. 다만 서방의 금융 제재와 현지 물류 혼란 등 대외적인 변수는 여전히 도사리고 있어 국내 경제에 미칠 여파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돈 그레이브스 미 상무부 부장관과 달링 싱 국가안보회의(NSC)·국가경제위원회(NEC) 부보좌관 등을 만나 이같이 합의했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4일 “한미간 협상에서 미국은 한국의 대(對)러시아 수출통제 이행방안이 국제사회의 수준과 잘 동조화(well-aligned)됐다고 평가하고, 한국을 러시아 수출통제 관련 FDPR 면제대상국에 포함하기로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 측은 수일 내 한국을 FDPR 면제국가 리스트에 포함하는 관보 게재 등의 조처를 할 계획이라고 확인했다”라며 “정부는 이번 FDPR 면제 결정과 함께 미국 등 국제사회와 유사한 수준의 추가적인 수출통제 조치에 들어가게 된다”라고 덧붙였다.

미 상무부가 지난달 24일 발표한 첫 면제국 명단에 한국이 포함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한국 수출통제 시스템은 미국과 약간 다르게 구성돼 있다. 미국과 비슷한 시스템을 가진 나라는 바로 시행할 수 있었는데, 한국의 경우 미국과 사전 협의가 많이 필요했다”라고 부연했다.

FDPR은 미국 밖의 외국기업이 만든 제품이라도 미국이 통제 대상으로 정한 미국산 소프트웨어나 기술을 사용했을 경우 미 정부가 수출을 금지할 수 있도록 한 제재 조항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중국 화웨이를 압박할 때 활용했던 제도다.

앞서 미 상무부는 지난달 24일 전자(반도체), 컴퓨터, 통신·정보보안 등 7개 분야 57개 하위 기술을 활용해 만든 제품을 러시아로 수출할 때는 미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발표했다. 발표 당시 유럽연합(EU) 27개국과 호주, 캐나다, 일본, 뉴질랜드, 영국 등 32개국은 FDPR 적용을 면제받았지만 한국은 적용 예외 대상에 들지 못했다. 당초 반도체, 컴퓨터, ICT 분야의 우리 기업들이 수출 통제 영향권에 들면서 피해 우려가 제기됐던 이유다.

다만 우리나라가 FDPR 면제국에 포함됐어도 기업들이 특정 품목을 러시아로 수출할 때 미국 등 국제 사회와 유사한 수준의 강도 높은 우리 정부 수출통제를 받아야 한다.

당장 정부는 이날 러시아 국방부 등 미국이 지정한 49개 우려거래자 기업 등을 우려거래자 목록에 추가했다. 우려거래자 목록에 오른 기업 등에 수출을 하려면 전략물자가 아니더라도 정부의 수출 허가를 얻어야 한다.

또 정부는 FDPR이 적용되는 기술과 품목의 경우 우리 정부의 수출허가를 받도록 관련 고시를 개정하고 있다. 비전략물자인 반도체와 정보통신, 레이저, 항공우주, 해양 등 모두 57개 항목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로부터 전달받은 목록이 구체적인 품목을 적시한 것은 아니어서 개정 고시를 확정하기까지는 미국 정부와 추가 협의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같은 고시 개정에 통상 2~3개월이 걸리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최대한 서둘러 1~2개월 안에 절차를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FDPR 면제로 제도적 불확실성은 해소됐지만 여러 가지 더 큰 악재들이 터져나와 대(對)러 수출 차질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상존한다.

우선 러시아를 상대로 한 서방국의 금융 제재가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의 ‘대금 결제 리스크’가 우려스럽다. 외신 등에 따르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는 러시아 은행들을 이달 12일부터 결제망에서 차단한다. 차단 대상은 러시아 2위 은행인 VTB를 비롯해 오트크리티예은행, 노비콤은행, PSB 등이다. 러시아 석유·가스 결제의 주요 창구인 러시아 최대 은행 스베르은행과 가스프롬은행은 배제됐지만 추후 포함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국제사회 비판 여론을 고려해 애플, 폭스바겐, 볼보 등 글로벌 기업들은 러시아 사업 중단을 선언했지만, 삼성전자‧LG전자‧현대차 등 국내 대기업들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러시아 시장 점유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현지 사업장을 운영하는 등 투자액과 교역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금융 결제 리스크가 현실화할 경우 큰 타격이 불가피한 셈이다.

현지 해운‧항공 차단에 따른 물류난과 루블화 가치 폭락 등 또 다른 대외 악재들이 터져 나오면서 제품을 제대로 팔 수 없는 상황도 현실화하고 있다.

당장 삼성전자부터 러시아에 수출하는 제품 선적을 중단했다. 지난 3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현재 지정학적 상황으로 인해 러시아행 선적이 중단됐다”면서 “복잡한 상황을 면밀히 파악해 다음 단계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해운사들이 러시아 입항을 거부하고 있는데다 원자재 가격 급등, 루블화 가치 하락 등 생산과 판매, 수출 전반에 걸쳐 큰 걸림돌들이 속속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말 기준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14.7%)보다 2배 이상 높은 34.5%의 점유율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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