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치가 아닌 법치를 바랐던 칭기즈칸은 대 쟈사크 (대칙령)을 통해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대칙령의 조항 하나하나를 보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리더였고 그가 어떤 세상을 꿈꾸었는지 볼 수 있다. 천하에 무서울 것 없는 칭기즈칸도 이 대칙령을 어기지 않고 철저히 지켰으며, 대칙령은 몽골제국의 통치를 탄탄하게 하고 칸의 권력을 강화해준 초석이 되었다. [1]그는 어떤 농업정주문명의 법을 따라하지 않았고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온 유목민 부족들의 관습과 전통을 강화했다. 동시에 자신의 새로운 사회에 방해가 되는 낡은 관행들은 없애 버렸다.
유목제국의 확장과 몰락초원이나 사막지대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주변의 강력한 농경정주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 후 농경정주민들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자신들 세력을 초원과 사막 바깥으로 확장시켜 농경정주국가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유목민족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농경정주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고 유목민족 특유의 야성을 잃게 되면 쇠락의 길을 걸었다.유목민족들은 원래 전투력과 기동력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
칭기즈칸도 한 때는 나약하고 찌질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몽골비사에서는 칭기즈칸이 태어날 때부터 핏덩이를 손에 쥐고 태어나서 위대한 정복자가 될 운명이었다고 하지만, 잘나가는 칭기즈칸 후손들이 조상을 미화하려고 만들어 놓은 신화에 불과하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영웅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그는 개를 무서워했고 잘 울었다. 부족들이 이사를 갈 때 그를 깜빡 잊고 놔두고 간 일화가 있을 정도이니 주목받는 자식도 아니었다.그가 8 내지 9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하자 여자와 애들만 남은
동서양을 넘나든 학술 교류이평래 ‘몽골제국과 동서문명의 교류’에서는 몽골제국 시절에는 동서간 학술과 과학교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특히 카안 울루스(원나라)와 훌레구 울루스의 교류가 활발했다. 대원의 수도 대도에는 이란과 이슬람권 학자들이 상주하고, 훌레구 울루스의 수도 타브리즈에서도 다수의 중국학자들이 활동했다. 유라시아 전역의 몽골의 칸 국들은 대군과 대량의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서 서로 역법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여러 장소에서 활동을 조정하고 사회생활을 규제해야 했다. 몽골제국은 새로운 지역을 정복할 때마다 행성과 별의 움
역참 ‘얌(Yam)’은 몽골제국 네트워크의 핏줄이었다. 13세기에서 14세기 초까지 주식회사 몽골제국은 제국 전체의 교역로를 유지했고 30Km에서 50Km마다 역참에 물자를 쟁여두었다. 마르코 폴로도 몽골제국을 여행하면서 역참을 자주 이용했다. 그는 이런 역참들이 ‘아름답고’, ‘으리으리할’뿐 아니라 ‘왕에게 어울리는 비단이나 다른 모든 사치품까지 갖추고 있다’고 묘사했다. 몽골제국은 이 교역로를 통한 무역을 장려하여 여권과 신용카드의 기능을 합친 초보적인 유형의 신분증인 ‘파이자’를 나누어 주었다. 칸국 간 상부상조, ‘쿠비’체계